Saturday, January 22, 2011

Friday, July 23, 2010

환갑 이야기

6.25 한국동란이 일어난지 올해로 60주년이 되었다고 한다. 그 말은 내가 60이 되었다는 말이다. 내가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몇일 안되어 태어났기 때문이다. 경인년이 다시 돌아와서 내게 금년은 환갑이다. 그러나 나는 생일을 받는 것이 쑥스럽고 거부감이 있어서 그냥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리고 평균수명이 60도 되지 않았던 옛날이나 환갑을 특별하게 축하하였지 지금이야 70이나 되어야 고희연을 받는다. 그뿐 아니라 내가 뭐라도 되는양 사람들을 초대하여 축하를 자청하는 것도 그리 덕이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사고가 났다. 내 아내와 세 아이들이 서로 짜고 비밀리에 환갑모임을 추진한 것이다.
내 아내가 그런 마음이 있는줄 알기에 절대 그런 일을 벌이지 말라고 신신 당부하고 확인까지 한 마당이어서 나는 믿었고 아이들은 모두 외국에 있어서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미국에서 의사고시를 준비하던 딸 수연이 시험을 한달 연기했다면서 갑자기 귀국하였고, 한국에 다녀간지 세주밖에 안된 막내 준하가 갑자기 한국에 돌아왔고 태국에서 대학교수를 하는 큰 아들 준범이도 바쁜 일정에서 휴강을 하고 귀국을 하였다. 그러나 한사코 내 생일을 가족들끼리 같이 보내려고 왔다고 할뿐 다른 계획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로 전날 아내가 꽃 시장에 가서 지나치게 많은 꽃을 사와서 이것은 뭔가 일을 벌인 것이라는 생각에 끝까지 추궁하여 결국 가족 친지와 친한 사람들을 초대하여 조촐한 감사예배를 드리기로 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순간 크게 당황하였으나 바로 내일 있을 일이라 취소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환갑을 치루게 되었다.


7월 3일 환갑날이 되어 11시에 동네에 있는 교회당에 가보니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나는 어색하고 너무 미안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멀리 부산에서 온 분들도 있고 광주에서 온 분도 있었다. 교회당은 집 가까이 숲 속에 있는 아름다운 교회당으로 벽이 모두 유리로 되어있어 그야말로 숲속에 있는 느낌을 주었다. 예배는 한영교회 김낙춘 목사가 주관하여 준비해주었고 사회를 맡았다. 기도는 한천설 교수가, 설교는 양용의 교수가 해 주었다. 조카들과 아이들이 축송을 불러주었다. 2부에서는 세 아이들이 아버지에 대해 감회를 이야기하였다.


비록 제한된 수이긴 하지만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내가 지난 60년동안 만나서 정을 나누고 서로 사랑을 나누게 된 사람들이어서 한결같이 반갑고 마음이 벅찼다. 사진도 소개할 겸 지난 60년의 세월을 간단히 회고해보려고 한다. 나는 부모님과 5남매의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딱 중간이었다. 누나, 형, 남동생, 여동생 중간에 내가 있었다.
사진에는 9순이 가까운 아버지와 세 형제만 있지만, 여동생과 미국에 사는 누나가 있다. 40여년전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온 가족으로부터 나는 많은 사랑을 받고 자라났다. 순탄치 않은 사춘기를 지났지만 부모님의 사랑가운데 아무 문제도 없은듯 지나갔다.

중학교 2학년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내 인생을 바꾸었다. 내 고향친구들은 신태인 제일교회라는 교회에서 만났다. 조현, 박종기, 노환우 세 친구가 왔고 왼쪽 두번째는 성실교회를 담임하는 후배 김영복 목사다. 그는 국민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까지 후배가 된 유일한 사람이다. 종기와 현이는 벌써 은퇴를 하고 남을 도와주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28살에 결혼을 했는데, 김정우 교수는 우리와 결혼동기다. 본래 아내가 CCC 간사출신이어서 그로 인해 CCC 사람들을 상당히 만나게 되었는데 김정우 교수 사모와 내 아내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더구나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하여 총신 앞 사당동 바로 이웃에 단간방 신혼살림을 차려서 같이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29살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칼빈신학교에서 M.Div와 Th.M.을 마치고 칼라마주 한인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38살에 한국에 일시 귀국하였다. 박사학위를 시작하기 전 아이들을 한국인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기간에 총신대와 개혁신학연구원에서 처음으로 강의를 하게 되었으며, 이 날 사진을 찍어준 새물결교회 김요한 목사도 그 때 내가 가르친 첫 제자중 한 사람이다. 39살과 40살에는 2년동안 둔촌동 초대교회를 목회하게 되었다. 벌써 20년전 인데도 이날 여러분들이 오셔서 봉사해주셨다.
41살에 나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자유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하기 위해 네델란드로 떠났다. 첫 1년은 어학공부로 좀 바빴지만, 그 뒤로는 혼자서 학위논문을 쓰는 지루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 때 화란에는 많지 않은 한국 유학생들이 와 있어서 모두 친하게 지냈다. 그 때 캄펜에서 공부하던 김지찬 교수와 한천설 교수와 가까이 지냈고, 틴데일에서 공부하던 김학유 교수도 이때 만났다. 특히 김 교수네는 결혼한지 오래되었는데도 아이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듣고 우리 아이들이 기도하기 시작하였는데 놀라울 정도로 끊임없이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얼마 안되어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우리 아이들을 많이 사랑해 주었다.
이 때 영국에 양용의 교수가 유학와 있었다. 옥스포드 위클리프 홀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서로 오가며 친하게 지냈다. 같은 학교에 박삼영 목사가 유학을 오게 되어 사귀면서 화란에 방문하기도 하였다. 화란 우리 집에 왔을 때 까날(운하)에 고무보트를 띄우고 두 딸을 태워주었는데, 날카롭게 깍아놓은 갈대 끝에 찔려 고무보트에 펑크가 나서 바람이 조금씩 빠져나가자 두 딸이 표정이 굳어지고 충격이 되어 두고두고 말하였다. 깊지 않아 별로 걱정이 안되었으나 어린 마음에 얼마나 두려웠을지를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울지도 않고 의젓하게 참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벌써 둘 다 처녀가 되어 있었다.

화란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45살에야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존경하는 이진태 박사님의 초청으로 개혁신학연구원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한 한기가 지난후 교권투쟁으로 교단이 분열되면서 신학교는 극심환 혼란과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때 교권파에 반대하여 교단개혁운동을 전개하며 이진태 박사님을 따르던 다섯교수가 바로 양용의, 한천설, 서요한, 이태훈 교수와 나였다. 많은 위협과 가난에 직면하면서도 동고동락하던 우리 다섯은 모두 한 형제같이 되었고, 지금도 그 때를 잊을 수 없다. 사모들도 서로 자매같이 친하게 되었다. 이 날 서요한 교수는 축시를 써서 낭독하고 액자에 넣어 주었다.

그래서인지 그 때 제자들이 지금까지 매년 스승의 날에 모여 우리를 청하고 행사를 갖고 진한 사제의 정을 나눈다. 사실 그때 학생들은 동지들과 같았고, 모든 교수들과 학생들이 음성 교사에서 같이 숙식을 하며 새벽부터 밤까지 하나가 되어 가족과 같았다. 이 날은 연락이 안 되어 몇명만 참석하였다.
화란에서 귀국한 뒤 나는 한영교회에 출석하였다. 은사 손봉호 교수님의 영향이었다. 거기서 협동설교자를 맡아 오후 성경공부를 지도하였다. 그러면서 담임목사인 김낙춘 목사와 사귀게 되었는데 그렇게 진실하고 진지한 목회자를 쉽게 만날 수 없어서 우리의 교제가 깊어지게 되었다. 김성수 교수는 거기서 신학생때 만났는데 매우 성실하고 겸손한 사람이어 정이 갔고 후에 칼빈신학교 후배가 되었다. 이광희 교수는 학교 후배로 잘 알고 있는데 같이 영동교회를 다녀서 김 목사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50살에 개혁신학교가 없어지면서 국제신대원으로 왔고 51살에는 미국 풀러신학교의 초청을 받아 다시 미국으로 들어갔다. 그랬다가 다시 58세에 나원 이사장의 초청을 받아 국제신대원으로 돌아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날 나 이사장이 감사기도를 해 주었고, 문효식, 장세훈, 김동춘, 이태훈 교수가 참석하였다. 많은 교수들이 외국에 나가있어 참석하지 못하였는데, 스위스에 간 안성삼 교수는 참석하지 못한다고 자기 교회 장로님 한 분을 광주에서 부터 오셔서 참석하도록 하여 너무 죄송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였다.

칼빈신학교 후배이며 지금은 부산 수영로교회에 와 있는 정모세 목사가 먼 거리인데도 기꺼이 참석해주어 고마웠다. 내 막내아들 준하는 금년에 막 칼빈신학교를 졸업하여 26년의 간격을 둔 세 사람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또 부산에서 내 아내 오빠 가족이 모두 참석해주었다. 항상 묵묵하게 깊은 정으로 아껴주는 형님이 나를 꽉 껴안아주는 포옹에서 따뜻한 사랑을 느꼈다. 동아대 의대 교수로서 산업의학분야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다. 새 언니와 내 아내는 친구처럼 지내어 보기가 좋다. 세 조카들도 모두 참석하여 행사 진행을 위해 많이 수고하였다.

Friday, July 31, 2009

태국으로 떠난 준범

7월 29일 오늘 아침 큰 아들 준범이가 타이항공을 타고 방콕으로 떠나서 인천공항에 다녀왔습니다. 준범이의 태국행 결정은 온 가족에게 충격적이었지만, 나는 그의 길을 축복하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내 아내와 결혼 30여년동안에 연년생 아이 3명을 키웠습니다. 큰 아들 준범이는 어릴때부터 우주에 관심을 가졌고, 외동딸 수연이는 의사가 되겠다고 하였으며, 작은 아들 준하는 유치원때부터 목사가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무엇이 되라고 한적이 없고 본인들이 원하는 인생을 살도록 하였습니다. 세 아이가 모두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대학교를 다녔고 같은날 같은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수연이와 준하는 뉴욕 에 가서 직장생활을 3년 한 후에 의과대학원과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자기들의 어린 소망을 이루어나가고 있습니다. 준하는 내가 M.Div.과정을 공부한 미시간 캘빈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내 28년 후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 준범이는 진로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텍사스공대의 우주항공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공부했지만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영주권을 받기까지 잠시 태국으로 가서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는데, 거기서 대학생선교에 소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태국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목사이지만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을 바꿔 미국에 돌아오게 하려하였습니다. 이제 순서가 되어 미국에 들어가는 인터뷰를 하러 한국에 왔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고심하더니, 자기 생일날 우리 부부에게 환하게 웃으며 태국을 선택했다고 축복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오랜 가슴앓이를 끝내고 즉시 축복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풍요로운 미국을 포기하고 무덥고 힘든 태국을 선택한 특별한 아들을 위해 기도하며 오늘 태국으로 떠나보내면서 큰 비전을 가지고 힘차게 살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번 여름에 세 아이가 모두 한국에 들어와 2년만에 온 가족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함께 여행도 하고 영화도 보고 찜질방에도 가고 정든 사람들도 만나고 가고싶다는 교회들도 찾아다니고 산소에도 가고 시간 가는줄 모르게 지내다가, 수연이는 실습을 위해 7월초에 미국으로 돌아갔고, 오늘 준범이가 태국으로 떠났습니다. 이제 셋이 있다 하나만 남았습니다. 물론 막내 준하도 8월말이면 마지막 학년을 마치러 돌아갈 것입니다. 세 자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유용하게 사용되기를 기도합니다. 자식 키우는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오늘은 한번 독자들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털어놓고 싶어졌습니다.

Wednesday, June 24, 2009

중국을 다녀와서

중국... 세계의 중심을 자처하는 대국으로 21세기를 맞아 다시 세계의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 관심이 가던 나라다. 나는 지난 6월 1일 처음으로 중국방문길에 올랐다. 교수퇴수회 장소로 선정되었기 때문에 교수들과 학교관계자, 그리고 총회임원들과 함께 인천공항을 떠나 여정에 올랐는데, 아시아나 항공으로 4시간을 비행하여 중국의 남서부에 있는 계림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우리를 처음 맞아준 것은 우중충한 공항과 무표정한 공항직원들이었고, 공항을 나가자마자 오염된 공기의 악취가 우리를 불안하게 하였다. 중국최고의 산수를 자랑한다는 계림이 자본주의로 오염된 실상을 대하면서 실망스러운 느낌이 들었고, 중국의 자연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현대인의 물질적 욕망으로 훼손되어가고 있음을 실감하였다.

계림이라는 도시는 인구 100만에 육박하는 신흥 관광도시로서 여기저기 공사를 하며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계림이라는 말은 계수나무가 많은 도시라는 뜻으로 온 도시를 계수나무가 뒤덮고 있었는데, 달 속에 계수나무가 있다는 [산토끼] 노래가 생각났다. 가을에 꽃이 피면 온 도시가 향기로 넘친다고 한다.

그러나 계림이 유명해진 것은 이 지역의 뛰어난 산수때문인데, 석회암의 활발한 침식작용으로 3만 6천개의 오밀조밀한 산이 형성되었고 그 사이로 이강이 흘러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산들은 높지 않고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한국의 산들과 같은 균형이나 웅장함이 없고 비뚤어지고 깍이면서 천태만상이었다. 문효식 목사님은 평소 중국산수화를 보면서 그 모양이 너무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여기 와보니 그게 아니라 실제의 모습 그대로라고 말했다. 우리에게는 역시 한국의 산이 더 아름답고 좋아보였다.

이 지역은 베트남과 국경을 하고있는 중국의 변두리로서 동남아의 문화가 완연하고 기후도 아열대에 속하여 덥고 습기가 있었다. 또한 이곳은 소수민족 자치구로서 장족, 묘족, 요족 등이 많이 사는 곳이어서 전체적으로 낙후된 모습이었다. 마침 모내기를 하는 철이었는데, 산에 층층으로 조그만 논을 만들어 계단식 경작을 하고 있었으며 물소를 이용하여 논을 가는 모습이 보였다. 무시받는 소수민족들의 지역이어서 보다 순수한 모습들이 있었지만, 중국정부가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모든 것을 상품화하여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중국인들은 참 재물을 좋아한다. 집집마다 문설주에 재복이 들어오기를 기원하는 글을 써서 붙여놓았다. 종교는 모두 혼합되어 기복화되었다. 불교, 도교, 힌두교 등이 혼합되어 모두 재복과 장수를 기도하고 있었다. 불상으로 가득찬 동굴을 통과한 강변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복을 받는다고 돈을 내고 쇠북을 치는데 그 뒤에 있는 바위에는 [기복]이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져 있었다.

공자의 나라였지만 예의가 없었고, 재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가짜의 왕국이었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나라였다. 이 사람들에게 물질주의적인 공산주의가 반 세기를 지배하였고, 이제 또 무윤리적인 자본주의가 팽배하면서 중국의 미래가 너무 걱정스러웠다. 물론 모든 인간이 재복을 원하지만 그래도 체면이 있고 대의명분이라는 것이 있어서 외식일지라도 겉으로는 정의나 사랑을 내거는데, 중국이라는 나라와 사람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재복을 추구한다고 써붙이고 주장하면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유별나다. 정신문명이 풍요한 나라로 거론되지만, 내가 보기에는 오늘의 중국은 정신문명이 빈곤한 나라였다. 불어나는 물질을 감당할만한 종교도 철학도 없는듯하였다. 내가 본 중국은 일부이며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 사실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중국선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되었다. 중국에도 외교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강태성 총무처장님은 그와 같이 빈곤한 가치관을 채워줄 책임이 바로 기독교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오로지 기독교의 복음만이 많은 물질을 감당하면서 건강한 세계제국으로 부상하도록 중국을 지도해줄 수 있다는 말이다. 나만을 위한 기복적 신앙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살려는 마음은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내 뇌리를 채우면서 중국에서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마음속에서 그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중국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대국이다. 중국이 하나님을 순종하는 나라가 될 때 세계복음화는 힘차게 진행될 것이다. 중국에서 예루살렘까지 책임지겠다는 중국교회 지도자들의 믿음이 이루어질 것이다. 중국인은 스케일이 크다. 계림의 복파산을 오르려니 입구에 마원장군의 기마상이 있었다. 베트남이 공격하자 중앙에서 마원장군이 내려와 화살을 쏘았는데 산을 몇개나 뚫어 구멍을 내면서 날아가 베트남에 꽃혔다는 전설을 표현하고 있었다. 베트남이 얼마나 떨어져있는데... 중국인의 허풍은 대단한데, 그것이 사실이 아닌줄 알면서도 그것을 생활화하고 믿는 것 같았다.

이강에서 산들을 배경으로 장이무 감독이 연출한 수상오페라 [인상유삼저]를 관람하였는데, 열개도 넘는 주변의 산을 모두 조명하며 8백명의 출연진이 강위에서 배를 타고 노래하는 대작의 스케일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런 중국의 저력이 자본주의에의 종속과 윤리의 실종으로 세계를 몰락하게 하지 말고 복음의 지도적 국가로서 성장하여 하나님과 사람들의 화해와 사랑을 이끄는 민족으로 거듭나고 축복받기를 기도하였다. 이를 위해 나도 무언가 일조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Thursday, January 1, 2009

원장님 내외분 묘지

오늘은 2009년 새해가 시작하는 1월 1일이다. 송선호 목사가 우리 부부와 정정관 목사를 초대하여 함께 점심을 하고 원장님 내외분 산소를 방문하였다. 두 분의 산소는 로스 앤젤레스에 온 한인들이 가장 많이 묻혀있는 Rosehill 묘지에 안장되었다. 입구에 있는 꽃 집에서 원장님과 사모님 묘지에 놓을 꽃 두 다발을 사서 올라갔는데 1월 1일이라 수많은 사람들이 묘지를 찾아와 복잡하였다. 올라가면서 보니 꽃도 많지만 여기저기 성탄장식을 한 무덤들이 많았다. 원장님 내외분의 산소는 산 정상 조금 아래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는데 산 전체가 무덤이라 찾기가 쉽지 않다.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는데 거의 정확히 찾아가 쉽게 두 분의 산소를 찾았다.

먼저 두분의 산소 앞에 꽃을 꼽고 송선호 목사가 두 분을 생각하며 기도를 드렸다. 그런 뒤 사진을 찍었는데, 미국은 봉분을 하지 않고 평토장을 한다. 그래서 비석도 땅에 깔아놓기 때문에 흙먼지로 더러워져 있었다. 내 아내와 송 목사 사모가 물을 받아와 꽃에도 주고 비석을 윤나게 딱았다.

원장님 내외분을 그리며 나와 송선호 목사, 그리고 정정관 목사가 함께 사진을 찍고 가족별로도 사진을 찍었다. 이제 모든 고생을 멀리하고 하늘나라에서 평안히 지내시며 이 땅에서처럼 정답게 지내실 생각을 하며 산소를 떠나 돌아왔다. 두 분은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아 우리 삶의 좌표가 되실 것이다.

Monday, October 27, 2008

수연이의 의대 입학


지난 8월 중순 내 사랑스러운 딸 수연이의 의대 입학식에 참석하였다. 의대는 미조리주에 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가는 의과대학원이다. 한국은 대학부터 의대로 들어가 예과 본과를 거치지만 미국은 대학에는 의대가 없고 대학원에만 의대가 있다.

수연이는 네델란드에서 국민학교를 다닐 때부터 의사가 되겠다고 하였다. 의료 선교사가 되겠다는 것이다. 화란에서 명문 중학교 김나지움에 들어가서도 공부를 아주 잘 해서 가만히 있어도 의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박사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수연이의 꿈이 깨지고 말았다. 영어와 화란어로 공부하였기 때문에 한국학교에 적응하지 못하였다. 영어나 불어는 잘 했지만 그 이외의 과목은 교과서를 잘 이해하지 못하여 성적이 좋지 못하였기에 한국에서 의대를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나에게 한번도 불평을 하지 않고 항상 웃음과 감사를 잃지 않았던 수연이가 어느 날 내게 호소하듯이 눈물을 글썽이며 "아빠, 꼭 한국에 왔어야 했어요?"하고 말했을 때 내 마음이 찢어지는듯 하였다.

결국 세 아이가 모두 비슷한 상황이어서 그들의 인생을 위해 아이들만 미국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텍사스로 보내어 고3부터 공부를 하면서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다시 희망을 가지고 공부를 회복하였고, 오스틴 텍사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의과대학원에 갈 수 있는 좋은 성적을 얻었다. 그러나 대학 3학년때 교회에서 대학생회장을 맡아 교회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성적이 떨어져 의대 입학이 어렵게 되었다. 수연이도 우리 부부도 실망하고 포기하는줄 알았으나, 대학 졸업 후 뉴욕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의대 수능시험인 MCAT을 혼자 열심히 준비하여 금년에 의과대학원에 합격하여 수연이가 국민학교 때부터 헌신한 기도가 이루어졌다. 항상 우리 가정과 나에게 기쁨을 주었던 사랑하는 딸 수연이의 인내와 노력이 대견하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다.

이제 의과대학원 4년의 힘든 학업을 마치고 수련기간을 거쳐야 의사가 되지만, 지금까지 함께해주신 주님께서 모든 과정을 다 잘 마치고 좋은 의사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기여하고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귀한 딸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내가 가슴을 다쳐 아픈 몸으로 먼 길을 가서 참석한 여행이었지만 너무 기쁘고 큰 위로가 되었다.

Tuesday, May 27, 2008

영원한 동행을 위해 하늘로 가신 김희선 사모님


주일 아침 교회를 가기 전에 백인열 목사가 보낸 이메일을 받았다. 제목은 "사모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그 순간 많은 생각이 내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드디어 하늘로 가셨구나! 작년에 이진태 원장님을 하늘로 보내고 몸과 마음이 고통의 나날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너무 죄송했었는데... 멀리 이국에 있어 문병 한 번 못하고 외로울 때 전화를 주시면 아내와 한 없이 대화하셨고 또 아내가 자주 전화를 드리면서 나는 대개 아내를 통해 사모님의 아픈 마음을 듣곤 했었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고통과 외로움을. 나는 부음을 듣는 순간 아내에게 말했다. 사모님 기도가 들어진거야. 사모님은 원장님을 보내내시고는 1년만 더 살면서 뒷정리를 하고 1주년을 잘 한 다음 원장님 따라 하늘로 가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래 차라리 잘 되었다. 원장님을 사랑하고 내조해야 된다는 일념으로 사신 분인데 원장님 안 계시는 세상을 살 이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기도를 그대로 들어주신 것을 보면. 천사 같은 원장님을 수호 천사 같이 지켜주신 사모님의 일생이 너무 아프고도 귀하다. 암 말기와 당뇨가 겹쳐 고생길만 남아있었는데... 차라리 잘 된 것이다. 하나님이 사모님을 불쌍이 여기신 것일게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움과 아픔이 남겠지만... 얼마전 한국에서 1주기 추도식을 잘 마치고 추모문집 [동행]이라는 책과 CD를 보내주셔서 본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45년의 동행이 부족하여 영원한 동행을 위해 하늘로 가신 것이다. 한국 정리하고 미국에 와서 사시면 잘 모시려 했는데...

오늘 한국에서 장례식을 한다고 서요한 교수가 전화로 알려왔다. 그리고 어제는 유해가 미국으로 오면 하관식 주례를 해달라고 여기 사는 조카가 전화를 주셨다. 주일 예배 후 화요일 한국을 방문할 송선호 목사를 만나 혹시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는데 어렵겠다. 이제 여기 오시면 원장님 옆에 같이 누워 영원히 동행하게 될 하관식에서나 뵐 수 있겠다. 시인의 감성과 여장부의 용기를 겸비하신 사모님을 이 땅 위에서는 다시 뵐 수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