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October 27, 2008

수연이의 의대 입학


지난 8월 중순 내 사랑스러운 딸 수연이의 의대 입학식에 참석하였다. 의대는 미조리주에 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가는 의과대학원이다. 한국은 대학부터 의대로 들어가 예과 본과를 거치지만 미국은 대학에는 의대가 없고 대학원에만 의대가 있다.

수연이는 네델란드에서 국민학교를 다닐 때부터 의사가 되겠다고 하였다. 의료 선교사가 되겠다는 것이다. 화란에서 명문 중학교 김나지움에 들어가서도 공부를 아주 잘 해서 가만히 있어도 의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박사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수연이의 꿈이 깨지고 말았다. 영어와 화란어로 공부하였기 때문에 한국학교에 적응하지 못하였다. 영어나 불어는 잘 했지만 그 이외의 과목은 교과서를 잘 이해하지 못하여 성적이 좋지 못하였기에 한국에서 의대를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나에게 한번도 불평을 하지 않고 항상 웃음과 감사를 잃지 않았던 수연이가 어느 날 내게 호소하듯이 눈물을 글썽이며 "아빠, 꼭 한국에 왔어야 했어요?"하고 말했을 때 내 마음이 찢어지는듯 하였다.

결국 세 아이가 모두 비슷한 상황이어서 그들의 인생을 위해 아이들만 미국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텍사스로 보내어 고3부터 공부를 하면서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다시 희망을 가지고 공부를 회복하였고, 오스틴 텍사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의과대학원에 갈 수 있는 좋은 성적을 얻었다. 그러나 대학 3학년때 교회에서 대학생회장을 맡아 교회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성적이 떨어져 의대 입학이 어렵게 되었다. 수연이도 우리 부부도 실망하고 포기하는줄 알았으나, 대학 졸업 후 뉴욕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의대 수능시험인 MCAT을 혼자 열심히 준비하여 금년에 의과대학원에 합격하여 수연이가 국민학교 때부터 헌신한 기도가 이루어졌다. 항상 우리 가정과 나에게 기쁨을 주었던 사랑하는 딸 수연이의 인내와 노력이 대견하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다.

이제 의과대학원 4년의 힘든 학업을 마치고 수련기간을 거쳐야 의사가 되지만, 지금까지 함께해주신 주님께서 모든 과정을 다 잘 마치고 좋은 의사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기여하고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귀한 딸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내가 가슴을 다쳐 아픈 몸으로 먼 길을 가서 참석한 여행이었지만 너무 기쁘고 큰 위로가 되었다.

Tuesday, May 27, 2008

영원한 동행을 위해 하늘로 가신 김희선 사모님


주일 아침 교회를 가기 전에 백인열 목사가 보낸 이메일을 받았다. 제목은 "사모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그 순간 많은 생각이 내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드디어 하늘로 가셨구나! 작년에 이진태 원장님을 하늘로 보내고 몸과 마음이 고통의 나날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너무 죄송했었는데... 멀리 이국에 있어 문병 한 번 못하고 외로울 때 전화를 주시면 아내와 한 없이 대화하셨고 또 아내가 자주 전화를 드리면서 나는 대개 아내를 통해 사모님의 아픈 마음을 듣곤 했었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고통과 외로움을. 나는 부음을 듣는 순간 아내에게 말했다. 사모님 기도가 들어진거야. 사모님은 원장님을 보내내시고는 1년만 더 살면서 뒷정리를 하고 1주년을 잘 한 다음 원장님 따라 하늘로 가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래 차라리 잘 되었다. 원장님을 사랑하고 내조해야 된다는 일념으로 사신 분인데 원장님 안 계시는 세상을 살 이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기도를 그대로 들어주신 것을 보면. 천사 같은 원장님을 수호 천사 같이 지켜주신 사모님의 일생이 너무 아프고도 귀하다. 암 말기와 당뇨가 겹쳐 고생길만 남아있었는데... 차라리 잘 된 것이다. 하나님이 사모님을 불쌍이 여기신 것일게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움과 아픔이 남겠지만... 얼마전 한국에서 1주기 추도식을 잘 마치고 추모문집 [동행]이라는 책과 CD를 보내주셔서 본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45년의 동행이 부족하여 영원한 동행을 위해 하늘로 가신 것이다. 한국 정리하고 미국에 와서 사시면 잘 모시려 했는데...

오늘 한국에서 장례식을 한다고 서요한 교수가 전화로 알려왔다. 그리고 어제는 유해가 미국으로 오면 하관식 주례를 해달라고 여기 사는 조카가 전화를 주셨다. 주일 예배 후 화요일 한국을 방문할 송선호 목사를 만나 혹시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는데 어렵겠다. 이제 여기 오시면 원장님 옆에 같이 누워 영원히 동행하게 될 하관식에서나 뵐 수 있겠다. 시인의 감성과 여장부의 용기를 겸비하신 사모님을 이 땅 위에서는 다시 뵐 수 없겠지만...

Thursday, May 8, 2008

손봉호 교수님과 함께

내가 처음 철학을 접한 것은 대학 1학년때였다. 당시 총신대 신학과는 두 전공으로 나뉘었고, 그 중에서 나는 기독교철학을 선택하였다. 내 처음 철학교수는 당시 한국철학회 회장이었고 중앙대 교수였던 서동익 박사였다. 그는 내게 철학적 사고를 가르쳐주었고, 특히 데카르트를 배우게 되면서 내 신앙에 대한 철학적 비판의 과정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2학년때 소천하는 바람에 한참 철학에 심취하다 선생님을 잃었는데 마침 화란에서 손봉호 교수님이 귀국하여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3-4학년 철학전공 모든 과목을 손 교수님에게 배웠기 때문에 비록 외대 교수로 있었지만 내 지도교수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학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시면서 나는 학교뿐 아니라 실례인지도 모르고 댁으로까지 찾아가 배웠다. 또한 기독교철학회를 창설하고 초대회장이 되었고 손 교수님이 지도교수였기 때문에 항상 가까이서 모시고 배웠다. 화란의 기독교철학자 헤르만 도이베르트의 4권으로 된 New Critique of Theorethical Thoughts를 읽어나가고 전문용어집을 만들면서 나의 철학적 사고가 형성되었다. 또한 손 교수님의 학위논문을 공부하고, 그가 전공한 칸트와 훗설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칸트의 주저를 모두 독파하였다. 그 외에도 철학사 전반에 걸쳐 정말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고 한국철학회에도 참석하여 다른 철학교수들과도 접하게 되었다. 그 때 같이 기독교철학회에서 공부하였던 친구 문석호는 대학 졸업후 대학원을 철학과로 진학하여 철학을 전공하였다. 그 후 미국에 와서 신학도 공부하였으나, 모교로 부임하여 철학신학 교수가 되었다. 또 손 교수님을 따르던 신국원은 가다머를 전공한후 모교로 돌아와 문화철학 교수가 되었으며, 그 외에도 많은 후배들이 손 교수님의 영향으로 철학에 심취하였으며 심지어 철학계로 진로를 바꾸기도 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후에는 손교수님이 서울영동교회를 개척하자 나를 부르셔서 그 교회 초창기에 교육전도사로 섬기기도 하였다. 손 교수님은 고신이라 그를 통해 고신 개혁그룹과 접하게 되었다. 또한 그 동안 교수님이 쓴 원고들을 모아 책을 출판하는 작업을 하였는데, 그 책이 [현대정신과 기독교적 지성]이다. 그리고 79년 유학을 떠나는데도 중요한 도움을 주셨고, 그 후에 미국에 있어 뵙지 못하였지만 항상 잊지 않았다.

더욱이 칼빈신학교에 유학을 와서 처음에는 교회사를 전공하려고 하였으나 내 사고의 틀이 역사적이기 보다는 철학적이어서 결국 전공을 조직신학으로 바꾸게 된 데에도 손 교수님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또한 손 교수님을 존경하게 된 것이 아마도 그가 공부한 화란 자유대학교에 대해 호감을 주었는지 결국 나도 박사학위를 위해 화란 자유대학교를 선택하게 되었다. 위에 있는 사진은 내가 화란에서 공부할 때 손 교수님이 유학후 귀국한 다음 처음으로 다시 화란을 방문했을 때 우리집에 오셔서 우리 정원에서 같이 찍은 사진이다.

손 교수님은 후에 유명한 분이 되었고, 기윤실을 창설하여 사회적으로 적극적인 활동가의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내가 95년 귀국한 후에 기윤실 활동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손교수님은 한결같이 진실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오셨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존경심이 매마르지 않는다. 내가 손교수님의 사회윤리사상이라는 글을 발표하자 교수님은 내가 자신보다도 더 자기를 잘 안다고 고마워하셨고, 창조적인 신학자가 되어서 자랑스럽다는 칭찬도 들었다. 내가 아무리 해도 그분의 명석한 사고와 수려한 언어와 일관된 삶을 따를 수는 없지만, 내 삶에 그 분이 들어와 내 스승이 되어주신 것을 항상 자랑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Wednesday, April 16, 2008

대학시절 교수님들과 함께


대학신문 편집국장 시절이다. 교수님들을 모시고 서율역 그릴에서 좌담회를 가지게 되었을 때 찍은 기념사진이다. 박아론, 김의환, 김희보, 박윤선, 김득룡 교수님이 앉아계시고, 뒤줄에는 신문사에서 함께 활동했던 노홍빈 기자, 김영우 학술부장, 나, 그리고 장정일 주간이다. 유신과 계엄으로 점철된 군사독재시절 대학신문에서 활동하며 어려움도 많았고 재미있는 사건도 많았다.

교수님들과의 만남은 나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박아론 교수님은 박형룡 박사님의 아들이었는데, 행동방식이 특이하였으나 새벽기도의 신학이라는 창조적인 저서를 쓰기도 하였다. 김의환 교수님은 고3때 전국 학생 수양회에서 처음 만나면서 따르게 되었고 대학시절 그가 시작한 새한교회와 에덴교회에 출석하였으며 조교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나를 여러모로 이끌어 주었으며, 결혼과 유학, 목사 안수 등 깊은 관계를 맺으며 복음주의적 열린 마음과 개혁 정신을 불어넣어 줌으로서 나의 첫 은사가 되었다. 김희보 교수님은 당시 학장이였는데, 내가 많이 힘들게 해드려 개인적으로 마음이 죄송하다. 박윤선 교수님은 내가 처음으로 알게된 신학자시다. 고1때 학생회에서 매주 요한계시록 강해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 담임목사님이 박윤선 교수님의 요한계시록 주석을 주시면서 그대로 하라고 하여 한 글자 놓치지 않고 거의 외다시피 정독하고 이해하였기 때문에 그 때 누군지 몰랐지만 나에게 최초로 신학을 접하게 해 주신 분이다. 총신에 와서 만나뵈었으며, 재학시절에도 사랑을 받았다. 미국에 온 후 덴버 인턴시절 그의 막내따님을 만났고, 로스 앤젤레스 아케디아에 살 때 큰 따님과 앞뒤집에 살아 박 교수님 자녀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덴버에서 따님집에 오셨을 때 모시고 록키산에 올라간 일이 있는데, 절경에서도 계속 기도만하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이 땅에 계시지 않지만 항상 인자하고 명철한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김득룡 교수님은 신문사 지도교수로서 유신시절 우리로 인해 힘든 역할을 감당하였으나 정이 많으셨고, 미국에서 자녀들이 캘빈에서 공부하게 되면서 가까이서 지내게 되었다.

노홍빈은 동향이고 영특한 후배였다. 김영우 선배는 대학시절부터 정치에 관여하며 김옥길 의원 선거에 참여하여 나도 선거감시단으로 따라 간 일이 있는데, 지금은 합동교단 정치실세가 되었다. 장정일 선배도 아프리카 선교사를 다녀온 후 성도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어제 같은데 벌써 35년전 사진이 되었다.

Saturday, April 12, 2008

박형룡 교수님과의 만남

한국 보수신학의 창시자인 박형룡 박사님과 만난 것은 총신대를 입학하면서였다. 그 만남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지 못한채 함께 사진이 찍혔다. 대학 1학년때 교양학회장을 맡았는데, 그 때 학장이였던 박형룡 박사님을 모시고 말씀을 듣기 전에 내가 기도하고 있다. 그 후 이 만남의 의미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영향을 받았고 내 신학의 기초를 형성하였으나, 미국에 유학온 후 점차 극복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분의 삶과 신학을 재조명하게 되었고 새롭게 인식하였다. 비록 그가 신학적으로 한국 장로교회를 분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였지만, 그가 지키고자 했던 역사적 기독교신앙에의 열정과 헌신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분이 가장 많이 외친 말은 "그루터기"였다고 기억된다. 통합과 분리한 후 외로움과 어려움에 시달리면서도 합동교단이라는 그루터기가 자라나서 큰 상수리나무가 되리라는 일념으로 사셨는데, 오늘날 그 바램은 이루어져서 수적으로 통합을 능가하는 최대의 교단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후유증은 지금도 남아 합동교단과 총신이 극복해야할 중요한 과제를 남겨주었다.

Wednesday, April 9, 2008

시간의 과학적 사용

TIME지에 게재된 시간과학 연구결과에 따르면, 어떤 생활형인가에 따라 효과적인 삶을 영위하는 시간대에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에 맞추어 시간표를 짜고 생활한다면 더 효율적인 성과를 거두는 인생을 살지 않을까 생각된다.

당신이 아침 8시에 일어나서 자정에 자는 올빼비(Night Owl)형이라면, 오전 10-12시가 가장 창조적인 시간이며, 낮 12-1시, 저녁 6-11시가 어려운 작업들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시간대에 해당한다. 오전 8-10시와 오후 2-3시는 집중하기 어려운 시간이며, 오후 3-6시는 전환기에 해당한다.

한편, 당신이 새벽 5시반에 일어나 저녁 10시에 자는 아침(Morning Person)형이라면, 아침 6-8시가 가장 창조적인 시간이며, 오전 8-12시 반과 오후 2시반-4시반이 어려운 작업들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시간대에 해당한다. 아침 5시반-6시와 오후 12시반-2시반, 그리고 저녁 8-10시는 집중하기 어려운 시간이며, 오후 4시반-8시가 전환기에 해당한다.

창조적인 시간대는 창조적인 사고와 아이디어 개발에 가장 효율적이며, 어려운 작업(problem solving)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시간에는 두뇌가 깨어 집중을 하기에 적합하므로 그 날의 과업을 처리히면 좋다. 집중하기 어려운 시간에는 휴식을 취하든지 집중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쉬운 일을 하면 좋고, 전환기는 하루 일과에서 신체가 다시 회복(rejuvenation)되는 시간이므로 일상적인 일이나 독서, 예술 감상, 게임 등 두뇌를 다시 신선하게 만드는 일이 적합하다고 한다.

하루 일과에서 가장 결정적인 시간은 오전 9시, 오후 1시반, 5시, 그리고, 취침전이라고 하는데, 오전 9시에는 두뇌가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준비가 완료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에서 가장 활력적인 두뇌 영양을 제공하는 아침을 거르지 말아야 한다. 오후 1시반에는 체온이 최저치로 떨어지고 정신도 쉬려고 하기 때문에 무리해서는 안 되며 중요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오후 5시는 운동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다. 오전에는 신체기관의 협동이 원할하지 않고 저녁은 수면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취침전에는 소화작용의 부담으로 인해 고질의 수면을 방해할 수 있는 간식 섭취를 피하고 조용한 수면 준비가 필요하다.

기상과 취침 시간에 차이가 있으면, 먼저 두 유형중 어디에 속하는지를 판단한 후, 자기 상황에 맞추어 추정하면 될 것이다. 비록 우리 마음대로 시간을 배정할 수 없는 현실이 있지만 가능한 한 시간과학을 참고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 몸은 실로 오묘하고 정확하여 그에 순응하면 건강하고 효율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미국의 교파별 종교지도


교회의 여성역할에 대한 성향별 의견차

교회에서 여성 안수와 집사 임직에 대한 의견 조사에게 성향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복음주의 계열에서는 매우 적은 반대의견을 보이는 반면, 보수주의 계열에서는 상당한 많은 반대가 있으나 주로 남자가 더 반대하는가 하면, 근본주의 계열에서는 반대가 그보다는 약하지만 여자가 더 반대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남녀의 전문직 진출 역전 (UC)


현대 학문의 세속화

화란 자유대학교 신문에 게재된 풍자화인데, 현대 학문이 왜(Waarom?)에는 관심이 없고 모두 어떻게(Hoe?)로 몰려가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다. 이 세계나 나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잘 살고 즐길 것인가에 마음이 모두 쏠려 있다. 따라서 모든 존재에게 이유를 주신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라는 질문도 결국은 왜? 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제네바의 미래형 교회 건축


개와 금붕어의 3년 우정


남대문의 운명

얼마전 남대문이 불에 타 없어졌다는 어처구니 없는 뉴스를 대한 적이 있다. 국보1호이며 서울의 얼굴이기도 하지만 자기를 방어할 능력이 없었다. 남대문 이야기를 들으며 전에 스크랩해두었던 사진 하나가 생각났다. 6.25 당시 서울이 공산당의 수중에 들어갔을 때 남대문에는 스탈린과 김일성 사진이 걸려있었다.

Tuesday, April 8, 2008

미시간에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지난 3월 24일 로스 앤젤레스를 떠나 아내와 함께 미시간을 다녀왔다. 1월 5일 한 겨울에 그곳을 출발하여 자동차로 4일 걸려 미 대륙을 횡단하여 이곳으로 돌아온지 근 세달만에 다시 정든 땅을 찾게 된 것이다. 미시간주는 내가 29년전 처음 유학온 곳이기도 하고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난 곳이기도 하고 칼빈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후 첫 목회를 한 곳이기도 하며, 또 다시 2005년 안식과 집필을 위해 찾아갔다가 다시 20여년전 첫 목회를 했던 정든 교회를 다시 섬기며 다시 정든 곳이기도 한, 나에게는 제2의 고향과 같이 포근하고 정다운 곳이다. 로스 앤젤레스 공항을 이륙한 후 4시간만에 시카고에 도착하였으며, 다시 적은 비행기로 갈아타고 30분을 날라 Grand Rapids 공항에 도착하였다. 우리 막내아들 준하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후 마음이 변치 않고 대학을 졸업한 후 바로 신학교 가기에는 아직 어리다고 3년 뉴욕에서 직장생활을 하고는 작년 가을부터 칼빈신학교에서 M.Div 공부를 시작하였다. 우리가 떠난 후 빈 집에서 혼자 긴 겨울을 지냈지만 항상 긍정적이다. LA는 더워서 낮에는 에어컨을 키고 다니는데 그곳은 3월말인데도 춥고 눈이 보였다. 올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오고 추웠다고 한다. 이번에 방문한 가장 중요한 목적은 거기 있는 집을 수리하여 시장에 내 놓으려고 한 것이었는데 눈이 내리고 추운 바람에 정원도 제대로 치우지 못하였다. 더욱이 수요일 하루 온 종일 CRC교단 신입목회자 교육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그 전날 12시가 되었는데도 잠이 안 오다가 LA 시간으로 12시인 새벽 3시가 되니 그 때부터 조금씩 졸리기 시작하였고 서너시간 자다가 깨어 강의를 시작했는데, 오후가 되니 서있기도 힘들고 피곤이 짓눌렀지만 오후 5시반까지 강의를 계속해야 되어서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그날 심하게 무리하여 지쳐버린 까닭에 목요일과 금요일 수리하고 정리할 것은 쌓였는데 별로 하지 못하고 준하에게 많은 일을 시키고는 토요일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의 노력으로 부동산 중개업자를 정하고 시장에 내놓게 되어 감사하다. 이 집이 어서 팔려야 경제적인 부담을 좀 덜 수 있게 된다. 미시간에 가서 산 이 집을 우리는 너무 즐기고 감사하며 살았다. 집이 운치가 있고 특히 집뒤에 울창한 숲이 있어서 사계절의 변화에 매일 감격하고 감사하며 살았다. 이제 LA로 와서 조그만 아파트에 월세로 들어가면서 많은 살림을 정리해야 되었지만, 나이가 들면 점점 더 정리해야 되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으로 위로 받으며 나그네의 삶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내 최초의 사진


내 최초의 사진이다. 국민학교 1학년때 아버지가 서울에서 모자를 사다 주셨는데, 그 때만 해도 모자 있는 아이들이 별로 없어서 서로 써보겠다고 잡고 당기는 바람에 모자 채양이 조금 뜯어졌다. 어느날 사진사가 집을 방문하자 어머니가 내게 꽃밭에 들어가 포즈를 취하라고 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것이 내 최초의 사진이 되었다. 벌써 50년이 지났다. 세월은 어느덧 이렇게 흘러...

블로그를 열며...

언제부터인가 블로그가 유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 아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웹 게시판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여 무시하였는데, 내 웹사이트는 내가 만들기 때문에 디자인이 너무 단순한데 블로그가 더 예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유혹을 받아 하나 만들었다. 그러나 보다 더 실제적인 이유는 얼마전까지 새 소식란을 운영하다 지워버렸더니 소식을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가끔은 내 마음 속을 맴도는 생각들을 형식에 구애 없이 쓰고 싶을 때도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