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16, 2008

대학시절 교수님들과 함께


대학신문 편집국장 시절이다. 교수님들을 모시고 서율역 그릴에서 좌담회를 가지게 되었을 때 찍은 기념사진이다. 박아론, 김의환, 김희보, 박윤선, 김득룡 교수님이 앉아계시고, 뒤줄에는 신문사에서 함께 활동했던 노홍빈 기자, 김영우 학술부장, 나, 그리고 장정일 주간이다. 유신과 계엄으로 점철된 군사독재시절 대학신문에서 활동하며 어려움도 많았고 재미있는 사건도 많았다.

교수님들과의 만남은 나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박아론 교수님은 박형룡 박사님의 아들이었는데, 행동방식이 특이하였으나 새벽기도의 신학이라는 창조적인 저서를 쓰기도 하였다. 김의환 교수님은 고3때 전국 학생 수양회에서 처음 만나면서 따르게 되었고 대학시절 그가 시작한 새한교회와 에덴교회에 출석하였으며 조교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나를 여러모로 이끌어 주었으며, 결혼과 유학, 목사 안수 등 깊은 관계를 맺으며 복음주의적 열린 마음과 개혁 정신을 불어넣어 줌으로서 나의 첫 은사가 되었다. 김희보 교수님은 당시 학장이였는데, 내가 많이 힘들게 해드려 개인적으로 마음이 죄송하다. 박윤선 교수님은 내가 처음으로 알게된 신학자시다. 고1때 학생회에서 매주 요한계시록 강해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 담임목사님이 박윤선 교수님의 요한계시록 주석을 주시면서 그대로 하라고 하여 한 글자 놓치지 않고 거의 외다시피 정독하고 이해하였기 때문에 그 때 누군지 몰랐지만 나에게 최초로 신학을 접하게 해 주신 분이다. 총신에 와서 만나뵈었으며, 재학시절에도 사랑을 받았다. 미국에 온 후 덴버 인턴시절 그의 막내따님을 만났고, 로스 앤젤레스 아케디아에 살 때 큰 따님과 앞뒤집에 살아 박 교수님 자녀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덴버에서 따님집에 오셨을 때 모시고 록키산에 올라간 일이 있는데, 절경에서도 계속 기도만하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이 땅에 계시지 않지만 항상 인자하고 명철한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김득룡 교수님은 신문사 지도교수로서 유신시절 우리로 인해 힘든 역할을 감당하였으나 정이 많으셨고, 미국에서 자녀들이 캘빈에서 공부하게 되면서 가까이서 지내게 되었다.

노홍빈은 동향이고 영특한 후배였다. 김영우 선배는 대학시절부터 정치에 관여하며 김옥길 의원 선거에 참여하여 나도 선거감시단으로 따라 간 일이 있는데, 지금은 합동교단 정치실세가 되었다. 장정일 선배도 아프리카 선교사를 다녀온 후 성도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어제 같은데 벌써 35년전 사진이 되었다.

Saturday, April 12, 2008

박형룡 교수님과의 만남

한국 보수신학의 창시자인 박형룡 박사님과 만난 것은 총신대를 입학하면서였다. 그 만남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지 못한채 함께 사진이 찍혔다. 대학 1학년때 교양학회장을 맡았는데, 그 때 학장이였던 박형룡 박사님을 모시고 말씀을 듣기 전에 내가 기도하고 있다. 그 후 이 만남의 의미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영향을 받았고 내 신학의 기초를 형성하였으나, 미국에 유학온 후 점차 극복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분의 삶과 신학을 재조명하게 되었고 새롭게 인식하였다. 비록 그가 신학적으로 한국 장로교회를 분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였지만, 그가 지키고자 했던 역사적 기독교신앙에의 열정과 헌신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분이 가장 많이 외친 말은 "그루터기"였다고 기억된다. 통합과 분리한 후 외로움과 어려움에 시달리면서도 합동교단이라는 그루터기가 자라나서 큰 상수리나무가 되리라는 일념으로 사셨는데, 오늘날 그 바램은 이루어져서 수적으로 통합을 능가하는 최대의 교단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후유증은 지금도 남아 합동교단과 총신이 극복해야할 중요한 과제를 남겨주었다.

Wednesday, April 9, 2008

시간의 과학적 사용

TIME지에 게재된 시간과학 연구결과에 따르면, 어떤 생활형인가에 따라 효과적인 삶을 영위하는 시간대에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에 맞추어 시간표를 짜고 생활한다면 더 효율적인 성과를 거두는 인생을 살지 않을까 생각된다.

당신이 아침 8시에 일어나서 자정에 자는 올빼비(Night Owl)형이라면, 오전 10-12시가 가장 창조적인 시간이며, 낮 12-1시, 저녁 6-11시가 어려운 작업들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시간대에 해당한다. 오전 8-10시와 오후 2-3시는 집중하기 어려운 시간이며, 오후 3-6시는 전환기에 해당한다.

한편, 당신이 새벽 5시반에 일어나 저녁 10시에 자는 아침(Morning Person)형이라면, 아침 6-8시가 가장 창조적인 시간이며, 오전 8-12시 반과 오후 2시반-4시반이 어려운 작업들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시간대에 해당한다. 아침 5시반-6시와 오후 12시반-2시반, 그리고 저녁 8-10시는 집중하기 어려운 시간이며, 오후 4시반-8시가 전환기에 해당한다.

창조적인 시간대는 창조적인 사고와 아이디어 개발에 가장 효율적이며, 어려운 작업(problem solving)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시간에는 두뇌가 깨어 집중을 하기에 적합하므로 그 날의 과업을 처리히면 좋다. 집중하기 어려운 시간에는 휴식을 취하든지 집중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쉬운 일을 하면 좋고, 전환기는 하루 일과에서 신체가 다시 회복(rejuvenation)되는 시간이므로 일상적인 일이나 독서, 예술 감상, 게임 등 두뇌를 다시 신선하게 만드는 일이 적합하다고 한다.

하루 일과에서 가장 결정적인 시간은 오전 9시, 오후 1시반, 5시, 그리고, 취침전이라고 하는데, 오전 9시에는 두뇌가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준비가 완료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에서 가장 활력적인 두뇌 영양을 제공하는 아침을 거르지 말아야 한다. 오후 1시반에는 체온이 최저치로 떨어지고 정신도 쉬려고 하기 때문에 무리해서는 안 되며 중요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오후 5시는 운동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다. 오전에는 신체기관의 협동이 원할하지 않고 저녁은 수면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취침전에는 소화작용의 부담으로 인해 고질의 수면을 방해할 수 있는 간식 섭취를 피하고 조용한 수면 준비가 필요하다.

기상과 취침 시간에 차이가 있으면, 먼저 두 유형중 어디에 속하는지를 판단한 후, 자기 상황에 맞추어 추정하면 될 것이다. 비록 우리 마음대로 시간을 배정할 수 없는 현실이 있지만 가능한 한 시간과학을 참고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 몸은 실로 오묘하고 정확하여 그에 순응하면 건강하고 효율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교회의 여성역할에 대한 성향별 의견차

교회에서 여성 안수와 집사 임직에 대한 의견 조사에게 성향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복음주의 계열에서는 매우 적은 반대의견을 보이는 반면, 보수주의 계열에서는 상당한 많은 반대가 있으나 주로 남자가 더 반대하는가 하면, 근본주의 계열에서는 반대가 그보다는 약하지만 여자가 더 반대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현대 학문의 세속화

화란 자유대학교 신문에 게재된 풍자화인데, 현대 학문이 왜(Waarom?)에는 관심이 없고 모두 어떻게(Hoe?)로 몰려가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다. 이 세계나 나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잘 살고 즐길 것인가에 마음이 모두 쏠려 있다. 따라서 모든 존재에게 이유를 주신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라는 질문도 결국은 왜? 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남대문의 운명

얼마전 남대문이 불에 타 없어졌다는 어처구니 없는 뉴스를 대한 적이 있다. 국보1호이며 서울의 얼굴이기도 하지만 자기를 방어할 능력이 없었다. 남대문 이야기를 들으며 전에 스크랩해두었던 사진 하나가 생각났다. 6.25 당시 서울이 공산당의 수중에 들어갔을 때 남대문에는 스탈린과 김일성 사진이 걸려있었다.

Tuesday, April 8, 2008

미시간에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지난 3월 24일 로스 앤젤레스를 떠나 아내와 함께 미시간을 다녀왔다. 1월 5일 한 겨울에 그곳을 출발하여 자동차로 4일 걸려 미 대륙을 횡단하여 이곳으로 돌아온지 근 세달만에 다시 정든 땅을 찾게 된 것이다. 미시간주는 내가 29년전 처음 유학온 곳이기도 하고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난 곳이기도 하고 칼빈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후 첫 목회를 한 곳이기도 하며, 또 다시 2005년 안식과 집필을 위해 찾아갔다가 다시 20여년전 첫 목회를 했던 정든 교회를 다시 섬기며 다시 정든 곳이기도 한, 나에게는 제2의 고향과 같이 포근하고 정다운 곳이다. 로스 앤젤레스 공항을 이륙한 후 4시간만에 시카고에 도착하였으며, 다시 적은 비행기로 갈아타고 30분을 날라 Grand Rapids 공항에 도착하였다. 우리 막내아들 준하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후 마음이 변치 않고 대학을 졸업한 후 바로 신학교 가기에는 아직 어리다고 3년 뉴욕에서 직장생활을 하고는 작년 가을부터 칼빈신학교에서 M.Div 공부를 시작하였다. 우리가 떠난 후 빈 집에서 혼자 긴 겨울을 지냈지만 항상 긍정적이다. LA는 더워서 낮에는 에어컨을 키고 다니는데 그곳은 3월말인데도 춥고 눈이 보였다. 올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오고 추웠다고 한다. 이번에 방문한 가장 중요한 목적은 거기 있는 집을 수리하여 시장에 내 놓으려고 한 것이었는데 눈이 내리고 추운 바람에 정원도 제대로 치우지 못하였다. 더욱이 수요일 하루 온 종일 CRC교단 신입목회자 교육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그 전날 12시가 되었는데도 잠이 안 오다가 LA 시간으로 12시인 새벽 3시가 되니 그 때부터 조금씩 졸리기 시작하였고 서너시간 자다가 깨어 강의를 시작했는데, 오후가 되니 서있기도 힘들고 피곤이 짓눌렀지만 오후 5시반까지 강의를 계속해야 되어서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그날 심하게 무리하여 지쳐버린 까닭에 목요일과 금요일 수리하고 정리할 것은 쌓였는데 별로 하지 못하고 준하에게 많은 일을 시키고는 토요일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의 노력으로 부동산 중개업자를 정하고 시장에 내놓게 되어 감사하다. 이 집이 어서 팔려야 경제적인 부담을 좀 덜 수 있게 된다. 미시간에 가서 산 이 집을 우리는 너무 즐기고 감사하며 살았다. 집이 운치가 있고 특히 집뒤에 울창한 숲이 있어서 사계절의 변화에 매일 감격하고 감사하며 살았다. 이제 LA로 와서 조그만 아파트에 월세로 들어가면서 많은 살림을 정리해야 되었지만, 나이가 들면 점점 더 정리해야 되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으로 위로 받으며 나그네의 삶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내 최초의 사진


내 최초의 사진이다. 국민학교 1학년때 아버지가 서울에서 모자를 사다 주셨는데, 그 때만 해도 모자 있는 아이들이 별로 없어서 서로 써보겠다고 잡고 당기는 바람에 모자 채양이 조금 뜯어졌다. 어느날 사진사가 집을 방문하자 어머니가 내게 꽃밭에 들어가 포즈를 취하라고 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것이 내 최초의 사진이 되었다. 벌써 50년이 지났다. 세월은 어느덧 이렇게 흘러...

블로그를 열며...

언제부터인가 블로그가 유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 아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웹 게시판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여 무시하였는데, 내 웹사이트는 내가 만들기 때문에 디자인이 너무 단순한데 블로그가 더 예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유혹을 받아 하나 만들었다. 그러나 보다 더 실제적인 이유는 얼마전까지 새 소식란을 운영하다 지워버렸더니 소식을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가끔은 내 마음 속을 맴도는 생각들을 형식에 구애 없이 쓰고 싶을 때도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