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y 27, 2008

영원한 동행을 위해 하늘로 가신 김희선 사모님


주일 아침 교회를 가기 전에 백인열 목사가 보낸 이메일을 받았다. 제목은 "사모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그 순간 많은 생각이 내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드디어 하늘로 가셨구나! 작년에 이진태 원장님을 하늘로 보내고 몸과 마음이 고통의 나날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너무 죄송했었는데... 멀리 이국에 있어 문병 한 번 못하고 외로울 때 전화를 주시면 아내와 한 없이 대화하셨고 또 아내가 자주 전화를 드리면서 나는 대개 아내를 통해 사모님의 아픈 마음을 듣곤 했었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고통과 외로움을. 나는 부음을 듣는 순간 아내에게 말했다. 사모님 기도가 들어진거야. 사모님은 원장님을 보내내시고는 1년만 더 살면서 뒷정리를 하고 1주년을 잘 한 다음 원장님 따라 하늘로 가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래 차라리 잘 되었다. 원장님을 사랑하고 내조해야 된다는 일념으로 사신 분인데 원장님 안 계시는 세상을 살 이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기도를 그대로 들어주신 것을 보면. 천사 같은 원장님을 수호 천사 같이 지켜주신 사모님의 일생이 너무 아프고도 귀하다. 암 말기와 당뇨가 겹쳐 고생길만 남아있었는데... 차라리 잘 된 것이다. 하나님이 사모님을 불쌍이 여기신 것일게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움과 아픔이 남겠지만... 얼마전 한국에서 1주기 추도식을 잘 마치고 추모문집 [동행]이라는 책과 CD를 보내주셔서 본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45년의 동행이 부족하여 영원한 동행을 위해 하늘로 가신 것이다. 한국 정리하고 미국에 와서 사시면 잘 모시려 했는데...

오늘 한국에서 장례식을 한다고 서요한 교수가 전화로 알려왔다. 그리고 어제는 유해가 미국으로 오면 하관식 주례를 해달라고 여기 사는 조카가 전화를 주셨다. 주일 예배 후 화요일 한국을 방문할 송선호 목사를 만나 혹시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는데 어렵겠다. 이제 여기 오시면 원장님 옆에 같이 누워 영원히 동행하게 될 하관식에서나 뵐 수 있겠다. 시인의 감성과 여장부의 용기를 겸비하신 사모님을 이 땅 위에서는 다시 뵐 수 없겠지만...

Thursday, May 8, 2008

손봉호 교수님과 함께

내가 처음 철학을 접한 것은 대학 1학년때였다. 당시 총신대 신학과는 두 전공으로 나뉘었고, 그 중에서 나는 기독교철학을 선택하였다. 내 처음 철학교수는 당시 한국철학회 회장이었고 중앙대 교수였던 서동익 박사였다. 그는 내게 철학적 사고를 가르쳐주었고, 특히 데카르트를 배우게 되면서 내 신앙에 대한 철학적 비판의 과정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2학년때 소천하는 바람에 한참 철학에 심취하다 선생님을 잃었는데 마침 화란에서 손봉호 교수님이 귀국하여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3-4학년 철학전공 모든 과목을 손 교수님에게 배웠기 때문에 비록 외대 교수로 있었지만 내 지도교수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학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시면서 나는 학교뿐 아니라 실례인지도 모르고 댁으로까지 찾아가 배웠다. 또한 기독교철학회를 창설하고 초대회장이 되었고 손 교수님이 지도교수였기 때문에 항상 가까이서 모시고 배웠다. 화란의 기독교철학자 헤르만 도이베르트의 4권으로 된 New Critique of Theorethical Thoughts를 읽어나가고 전문용어집을 만들면서 나의 철학적 사고가 형성되었다. 또한 손 교수님의 학위논문을 공부하고, 그가 전공한 칸트와 훗설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칸트의 주저를 모두 독파하였다. 그 외에도 철학사 전반에 걸쳐 정말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고 한국철학회에도 참석하여 다른 철학교수들과도 접하게 되었다. 그 때 같이 기독교철학회에서 공부하였던 친구 문석호는 대학 졸업후 대학원을 철학과로 진학하여 철학을 전공하였다. 그 후 미국에 와서 신학도 공부하였으나, 모교로 부임하여 철학신학 교수가 되었다. 또 손 교수님을 따르던 신국원은 가다머를 전공한후 모교로 돌아와 문화철학 교수가 되었으며, 그 외에도 많은 후배들이 손 교수님의 영향으로 철학에 심취하였으며 심지어 철학계로 진로를 바꾸기도 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후에는 손교수님이 서울영동교회를 개척하자 나를 부르셔서 그 교회 초창기에 교육전도사로 섬기기도 하였다. 손 교수님은 고신이라 그를 통해 고신 개혁그룹과 접하게 되었다. 또한 그 동안 교수님이 쓴 원고들을 모아 책을 출판하는 작업을 하였는데, 그 책이 [현대정신과 기독교적 지성]이다. 그리고 79년 유학을 떠나는데도 중요한 도움을 주셨고, 그 후에 미국에 있어 뵙지 못하였지만 항상 잊지 않았다.

더욱이 칼빈신학교에 유학을 와서 처음에는 교회사를 전공하려고 하였으나 내 사고의 틀이 역사적이기 보다는 철학적이어서 결국 전공을 조직신학으로 바꾸게 된 데에도 손 교수님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또한 손 교수님을 존경하게 된 것이 아마도 그가 공부한 화란 자유대학교에 대해 호감을 주었는지 결국 나도 박사학위를 위해 화란 자유대학교를 선택하게 되었다. 위에 있는 사진은 내가 화란에서 공부할 때 손 교수님이 유학후 귀국한 다음 처음으로 다시 화란을 방문했을 때 우리집에 오셔서 우리 정원에서 같이 찍은 사진이다.

손 교수님은 후에 유명한 분이 되었고, 기윤실을 창설하여 사회적으로 적극적인 활동가의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내가 95년 귀국한 후에 기윤실 활동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손교수님은 한결같이 진실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오셨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존경심이 매마르지 않는다. 내가 손교수님의 사회윤리사상이라는 글을 발표하자 교수님은 내가 자신보다도 더 자기를 잘 안다고 고마워하셨고, 창조적인 신학자가 되어서 자랑스럽다는 칭찬도 들었다. 내가 아무리 해도 그분의 명석한 사고와 수려한 언어와 일관된 삶을 따를 수는 없지만, 내 삶에 그 분이 들어와 내 스승이 되어주신 것을 항상 자랑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