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uly 31, 2009

태국으로 떠난 준범

7월 29일 오늘 아침 큰 아들 준범이가 타이항공을 타고 방콕으로 떠나서 인천공항에 다녀왔습니다. 준범이의 태국행 결정은 온 가족에게 충격적이었지만, 나는 그의 길을 축복하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내 아내와 결혼 30여년동안에 연년생 아이 3명을 키웠습니다. 큰 아들 준범이는 어릴때부터 우주에 관심을 가졌고, 외동딸 수연이는 의사가 되겠다고 하였으며, 작은 아들 준하는 유치원때부터 목사가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무엇이 되라고 한적이 없고 본인들이 원하는 인생을 살도록 하였습니다. 세 아이가 모두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대학교를 다녔고 같은날 같은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수연이와 준하는 뉴욕 에 가서 직장생활을 3년 한 후에 의과대학원과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자기들의 어린 소망을 이루어나가고 있습니다. 준하는 내가 M.Div.과정을 공부한 미시간 캘빈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내 28년 후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 준범이는 진로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텍사스공대의 우주항공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공부했지만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영주권을 받기까지 잠시 태국으로 가서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는데, 거기서 대학생선교에 소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태국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목사이지만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을 바꿔 미국에 돌아오게 하려하였습니다. 이제 순서가 되어 미국에 들어가는 인터뷰를 하러 한국에 왔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고심하더니, 자기 생일날 우리 부부에게 환하게 웃으며 태국을 선택했다고 축복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오랜 가슴앓이를 끝내고 즉시 축복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풍요로운 미국을 포기하고 무덥고 힘든 태국을 선택한 특별한 아들을 위해 기도하며 오늘 태국으로 떠나보내면서 큰 비전을 가지고 힘차게 살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번 여름에 세 아이가 모두 한국에 들어와 2년만에 온 가족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함께 여행도 하고 영화도 보고 찜질방에도 가고 정든 사람들도 만나고 가고싶다는 교회들도 찾아다니고 산소에도 가고 시간 가는줄 모르게 지내다가, 수연이는 실습을 위해 7월초에 미국으로 돌아갔고, 오늘 준범이가 태국으로 떠났습니다. 이제 셋이 있다 하나만 남았습니다. 물론 막내 준하도 8월말이면 마지막 학년을 마치러 돌아갈 것입니다. 세 자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유용하게 사용되기를 기도합니다. 자식 키우는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오늘은 한번 독자들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털어놓고 싶어졌습니다.

Wednesday, June 24, 2009

중국을 다녀와서

중국... 세계의 중심을 자처하는 대국으로 21세기를 맞아 다시 세계의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 관심이 가던 나라다. 나는 지난 6월 1일 처음으로 중국방문길에 올랐다. 교수퇴수회 장소로 선정되었기 때문에 교수들과 학교관계자, 그리고 총회임원들과 함께 인천공항을 떠나 여정에 올랐는데, 아시아나 항공으로 4시간을 비행하여 중국의 남서부에 있는 계림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우리를 처음 맞아준 것은 우중충한 공항과 무표정한 공항직원들이었고, 공항을 나가자마자 오염된 공기의 악취가 우리를 불안하게 하였다. 중국최고의 산수를 자랑한다는 계림이 자본주의로 오염된 실상을 대하면서 실망스러운 느낌이 들었고, 중국의 자연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현대인의 물질적 욕망으로 훼손되어가고 있음을 실감하였다.

계림이라는 도시는 인구 100만에 육박하는 신흥 관광도시로서 여기저기 공사를 하며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계림이라는 말은 계수나무가 많은 도시라는 뜻으로 온 도시를 계수나무가 뒤덮고 있었는데, 달 속에 계수나무가 있다는 [산토끼] 노래가 생각났다. 가을에 꽃이 피면 온 도시가 향기로 넘친다고 한다.

그러나 계림이 유명해진 것은 이 지역의 뛰어난 산수때문인데, 석회암의 활발한 침식작용으로 3만 6천개의 오밀조밀한 산이 형성되었고 그 사이로 이강이 흘러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산들은 높지 않고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한국의 산들과 같은 균형이나 웅장함이 없고 비뚤어지고 깍이면서 천태만상이었다. 문효식 목사님은 평소 중국산수화를 보면서 그 모양이 너무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여기 와보니 그게 아니라 실제의 모습 그대로라고 말했다. 우리에게는 역시 한국의 산이 더 아름답고 좋아보였다.

이 지역은 베트남과 국경을 하고있는 중국의 변두리로서 동남아의 문화가 완연하고 기후도 아열대에 속하여 덥고 습기가 있었다. 또한 이곳은 소수민족 자치구로서 장족, 묘족, 요족 등이 많이 사는 곳이어서 전체적으로 낙후된 모습이었다. 마침 모내기를 하는 철이었는데, 산에 층층으로 조그만 논을 만들어 계단식 경작을 하고 있었으며 물소를 이용하여 논을 가는 모습이 보였다. 무시받는 소수민족들의 지역이어서 보다 순수한 모습들이 있었지만, 중국정부가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모든 것을 상품화하여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중국인들은 참 재물을 좋아한다. 집집마다 문설주에 재복이 들어오기를 기원하는 글을 써서 붙여놓았다. 종교는 모두 혼합되어 기복화되었다. 불교, 도교, 힌두교 등이 혼합되어 모두 재복과 장수를 기도하고 있었다. 불상으로 가득찬 동굴을 통과한 강변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복을 받는다고 돈을 내고 쇠북을 치는데 그 뒤에 있는 바위에는 [기복]이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져 있었다.

공자의 나라였지만 예의가 없었고, 재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가짜의 왕국이었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나라였다. 이 사람들에게 물질주의적인 공산주의가 반 세기를 지배하였고, 이제 또 무윤리적인 자본주의가 팽배하면서 중국의 미래가 너무 걱정스러웠다. 물론 모든 인간이 재복을 원하지만 그래도 체면이 있고 대의명분이라는 것이 있어서 외식일지라도 겉으로는 정의나 사랑을 내거는데, 중국이라는 나라와 사람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재복을 추구한다고 써붙이고 주장하면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유별나다. 정신문명이 풍요한 나라로 거론되지만, 내가 보기에는 오늘의 중국은 정신문명이 빈곤한 나라였다. 불어나는 물질을 감당할만한 종교도 철학도 없는듯하였다. 내가 본 중국은 일부이며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 사실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중국선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되었다. 중국에도 외교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강태성 총무처장님은 그와 같이 빈곤한 가치관을 채워줄 책임이 바로 기독교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오로지 기독교의 복음만이 많은 물질을 감당하면서 건강한 세계제국으로 부상하도록 중국을 지도해줄 수 있다는 말이다. 나만을 위한 기복적 신앙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살려는 마음은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내 뇌리를 채우면서 중국에서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마음속에서 그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중국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대국이다. 중국이 하나님을 순종하는 나라가 될 때 세계복음화는 힘차게 진행될 것이다. 중국에서 예루살렘까지 책임지겠다는 중국교회 지도자들의 믿음이 이루어질 것이다. 중국인은 스케일이 크다. 계림의 복파산을 오르려니 입구에 마원장군의 기마상이 있었다. 베트남이 공격하자 중앙에서 마원장군이 내려와 화살을 쏘았는데 산을 몇개나 뚫어 구멍을 내면서 날아가 베트남에 꽃혔다는 전설을 표현하고 있었다. 베트남이 얼마나 떨어져있는데... 중국인의 허풍은 대단한데, 그것이 사실이 아닌줄 알면서도 그것을 생활화하고 믿는 것 같았다.

이강에서 산들을 배경으로 장이무 감독이 연출한 수상오페라 [인상유삼저]를 관람하였는데, 열개도 넘는 주변의 산을 모두 조명하며 8백명의 출연진이 강위에서 배를 타고 노래하는 대작의 스케일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런 중국의 저력이 자본주의에의 종속과 윤리의 실종으로 세계를 몰락하게 하지 말고 복음의 지도적 국가로서 성장하여 하나님과 사람들의 화해와 사랑을 이끄는 민족으로 거듭나고 축복받기를 기도하였다. 이를 위해 나도 무언가 일조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Thursday, January 1, 2009

원장님 내외분 묘지

오늘은 2009년 새해가 시작하는 1월 1일이다. 송선호 목사가 우리 부부와 정정관 목사를 초대하여 함께 점심을 하고 원장님 내외분 산소를 방문하였다. 두 분의 산소는 로스 앤젤레스에 온 한인들이 가장 많이 묻혀있는 Rosehill 묘지에 안장되었다. 입구에 있는 꽃 집에서 원장님과 사모님 묘지에 놓을 꽃 두 다발을 사서 올라갔는데 1월 1일이라 수많은 사람들이 묘지를 찾아와 복잡하였다. 올라가면서 보니 꽃도 많지만 여기저기 성탄장식을 한 무덤들이 많았다. 원장님 내외분의 산소는 산 정상 조금 아래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는데 산 전체가 무덤이라 찾기가 쉽지 않다.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는데 거의 정확히 찾아가 쉽게 두 분의 산소를 찾았다.

먼저 두분의 산소 앞에 꽃을 꼽고 송선호 목사가 두 분을 생각하며 기도를 드렸다. 그런 뒤 사진을 찍었는데, 미국은 봉분을 하지 않고 평토장을 한다. 그래서 비석도 땅에 깔아놓기 때문에 흙먼지로 더러워져 있었다. 내 아내와 송 목사 사모가 물을 받아와 꽃에도 주고 비석을 윤나게 딱았다.

원장님 내외분을 그리며 나와 송선호 목사, 그리고 정정관 목사가 함께 사진을 찍고 가족별로도 사진을 찍었다. 이제 모든 고생을 멀리하고 하늘나라에서 평안히 지내시며 이 땅에서처럼 정답게 지내실 생각을 하며 산소를 떠나 돌아왔다. 두 분은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아 우리 삶의 좌표가 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