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동란이 일어난지 올해로 60주년이 되었다고 한다. 그 말은 내가 60이 되었다는 말이다. 내가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몇일 안되어 태어났기 때문이다. 경인년이 다시 돌아와서 내게 금년은 환갑이다. 그러나 나는 생일을 받는 것이 쑥스럽고 거부감이 있어서 그냥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리고 평균수명이 60도 되지 않았던 옛날이나 환갑을 특별하게 축하하였지 지금이야 70이나 되어야 고희연을 받는다. 그뿐 아니라 내가 뭐라도 되는양 사람들을 초대하여 축하를 자청하는 것도 그리 덕이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사고가 났다. 내 아내와 세 아이들이 서로 짜고 비밀리에 환갑모임을 추진한 것이다.

내 아내가 그런 마음이 있는줄 알기에 절대 그런 일을 벌이지 말라고 신신 당부하고 확인까지 한 마당이어서 나는 믿었고 아이들은 모두 외국에 있어서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미국에서 의사고시를 준비하던 딸 수연이 시험을 한달 연기했다면서 갑자기 귀국하였고, 한국에 다녀간지 세주밖에 안된 막내 준하가 갑자기 한국에 돌아왔고 태국에서 대학교수를 하는 큰 아들 준범이도 바쁜 일정에서 휴강을 하고 귀국을 하였다. 그러나 한사코 내 생일을 가족들끼리 같이 보내려고 왔다고 할뿐 다른 계획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로 전날 아내가 꽃 시장에 가서 지나치게 많은 꽃을 사와서 이것은 뭔가 일을 벌인 것이라는 생각에 끝까지 추궁하여 결국 가족 친지와 친한 사람들을 초대하여 조촐한 감사예배를 드리기로 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순간 크게 당황하였으나 바로 내일 있을 일이라 취소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환갑을 치루게 되었다.

7월 3일 환갑날이 되어 11시에 동네에 있는 교회당에 가보니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나는 어색하고 너무 미안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멀리 부산에서 온 분들도 있고 광주에서 온 분도 있었다. 교회당은 집 가까이 숲 속에 있는 아름다운 교회당으로 벽이 모두 유리로 되어있어 그야말로 숲속에 있는 느낌을 주었다. 예배는 한영교회 김낙춘 목사가 주관하여 준비해주었고 사회를 맡았다. 기도는 한천설 교수가, 설교는 양용의 교수가 해 주었다. 조카들과 아이들이 축송을 불러주었다. 2부에서는 세 아이들이 아버지에 대해 감회를 이야기하였다.

비록 제한된 수이긴 하지만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내가 지난 60년동안 만나서 정을 나누고 서로 사랑을 나누게 된 사람들이어서 한결같이 반갑고 마음이 벅찼다. 사진도 소개할 겸 지난 60년의 세월을 간단히 회고해보려고 한다. 나는 부모님과 5남매의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딱 중간이었다. 누나, 형, 남동생, 여동생 중간에 내가 있었다.

사진에는 9순이 가까운 아버지와 세 형제만 있지만, 여동생과 미국에 사는 누나가 있다. 40여년전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온 가족으로부터 나는 많은 사랑을 받고 자라났다. 순탄치 않은 사춘기를 지났지만 부모님의 사랑가운데 아무 문제도 없은듯 지나갔다.
중학교 2학년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내 인생을 바꾸었다. 내 고향친구들은 신태인 제일교회라는 교회에서 만났다. 조현, 박종기, 노환우 세 친구가 왔고 왼쪽 두번째는 성실교회를 담임하는 후배 김영복 목사다. 그는 국민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까지 후배가 된 유일한 사람이다. 종기와 현이는 벌써 은퇴를 하고 남을 도와주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28살에 결혼을 했는데, 김정우 교수는 우리와 결혼동기다. 본래 아내가 CCC 간사출신이어서 그로 인해 CCC 사람들을 상당히 만나게 되었는데 김정우 교수 사모와 내 아내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더구나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하여 총신 앞 사당동 바로 이웃에 단간방 신혼살림을 차려서 같이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29살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칼빈신학교에서 M.Div와 Th.M.을 마치고 칼라마주 한인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38살에 한국에 일시 귀국하였다. 박사학위를 시작하기 전 아이들을 한국인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기간에 총신대와 개혁신학연구원에서 처음으로 강의를 하게 되었으며, 이 날 사진을 찍어준 새물결교회 김요한 목사도 그 때 내가 가르친 첫 제자중 한 사람이다. 39살과 40살에는 2년동안 둔촌동 초대교회를 목회하게 되었다. 벌써 20년전 인데도 이날 여러분들이 오셔서 봉사해주셨다.

41살에 나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자유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하기 위해 네델란드로 떠났다. 첫 1년은 어학공부로 좀 바빴지만, 그 뒤로는 혼자서 학위논문을 쓰는 지루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 때 화란에는 많지 않은 한국 유학생들이 와 있어서 모두 친하게 지냈다. 그 때 캄펜에서 공부하던 김지찬 교수와 한천설 교수와 가까이 지냈고, 틴데일에서 공부하던 김학유 교수도 이때 만났다. 특히 김 교수네는 결혼한지 오래되었는데도 아이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듣고 우리 아이들이 기도하기 시작하였는데 놀라울 정도로 끊임없이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얼마 안되어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우리 아이들을 많이 사랑해 주었다.

이 때 영국에 양용의 교수가 유학와 있었다. 옥스포드 위클리프 홀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서로 오가며 친하게 지냈다. 같은 학교에 박삼영 목사가 유학을 오게 되어 사귀면서 화란에 방문하기도 하였다. 화란 우리 집에 왔을 때 까날(운하)에 고무보트를 띄우고 두 딸을 태워주었는데, 날카롭게 깍아놓은 갈대 끝에 찔려 고무보트에 펑크가 나서 바람이 조금씩 빠져나가자 두 딸이 표정이 굳어지고 충격이 되어 두고두고 말하였다. 깊지 않아 별로 걱정이 안되었으나 어린 마음에 얼마나 두려웠을지를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울지도 않고 의젓하게 참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벌써 둘 다 처녀가 되어 있었다.

화란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45살에야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존경하는 이진태 박사님의 초청으로 개혁신학연구원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한 한기가 지난후 교권투쟁으로 교단이 분열되면서 신학교는 극심환 혼란과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때 교권파에 반대하여 교단개혁운동을 전개하며 이진태 박사님을 따르던 다섯교수가 바로 양용의, 한천설, 서요한, 이태훈 교수와 나였다. 많은 위협과 가난에 직면하면서도 동고동락하던 우리 다섯은 모두 한 형제같이 되었고, 지금도 그 때를 잊을 수 없다. 사모들도 서로 자매같이 친하게 되었다. 이 날 서요한 교수는 축시를 써서 낭독하고 액자에 넣어 주었다.

그래서인지 그 때 제자들이 지금까지 매년 스승의 날에 모여 우리를 청하고 행사를 갖고 진한 사제의 정을 나눈다. 사실 그때 학생들은 동지들과 같았고, 모든 교수들과 학생들이 음성 교사에서 같이 숙식을 하며 새벽부터 밤까지 하나가 되어 가족과 같았다. 이 날은 연락이 안 되어 몇명만 참석하였다.

화란에서 귀국한 뒤 나는 한영교회에 출석하였다. 은사 손봉호 교수님의 영향이었다. 거기서 협동설교자를 맡아 오후 성경공부를 지도하였다. 그러면서 담임목사인 김낙춘 목사와 사귀게 되었는데 그렇게 진실하고 진지한 목회자를 쉽게 만날 수 없어서 우리의 교제가 깊어지게 되었다. 김성수 교수는 거기서 신학생때 만났는데 매우 성실하고 겸손한 사람이어 정이 갔고 후에 칼빈신학교 후배가 되었다. 이광희 교수는 학교 후배로 잘 알고 있는데 같이 영동교회를 다녀서 김 목사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50살에 개혁신학교가 없어지면서 국제신대원으로 왔고 51살에는 미국 풀러신학교의 초청을 받아 다시 미국으로 들어갔다. 그랬다가 다시 58세에 나원 이사장의 초청을 받아 국제신대원으로 돌아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날 나 이사장이 감사기도를 해 주었고, 문효식, 장세훈, 김동춘, 이태훈 교수가 참석하였다. 많은 교수들이 외국에 나가있어 참석하지 못하였는데, 스위스에 간 안성삼 교수는 참석하지 못한다고 자기 교회 장로님 한 분을 광주에서 부터 오셔서 참석하도록 하여 너무 죄송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였다.
칼빈신학교 후배이며 지금은 부산 수영로교회에 와 있는 정모세 목사가 먼 거리인데도 기꺼이 참석해주어 고마웠다. 내 막내아들 준하는 금년에 막 칼빈신학교를 졸업하여 26년의 간격을 둔 세 사람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또 부산에서 내 아내 오빠 가족이 모두 참석해주었다. 항상 묵묵하게 깊은 정으로 아껴주는 형님이 나를 꽉 껴안아주는 포옹에서 따뜻한 사랑을 느꼈다. 동아대 의대 교수로서 산업의학분야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다. 새 언니와 내 아내는 친구처럼 지내어 보기가 좋다. 세 조카들도 모두 참석하여 행사 진행을 위해 많이 수고하였다.